신상현의 이것저것

팬 번역 후기(Memory Merge 자막 번역)

개발자 신상현 2025. 1. 18. 22:16

노래를 발견하다.

방학하기 얼마전인 12월 말, 나는 유튜브가 알고리즘에 따라 추천해준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 와중 내 눈에 띈 노래가 있었다.

유튜브 링크

yonkagor라는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뮤직비디오인데, 갖고 있는 속성이 대략적으로
퍼리 + 팝송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내가 평소에 듣던 노래들의 공통분모는 보컬로이드 + J-POP 이기에 전혀 다른 장르의 노래였지만 금방 마음에 들었고, 이번달동안 자주 듣는 노래가 되었다.

근데 뮤비를 틀어놓고 게임을 하던 도중 발견한 문제가 있었다.
자막이 이상했다.
알고보니 한국어 자막이 없어 다른 자막을 유튜브가 번역한걸 표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어 자막을 보려고 했더니 없었다.


(지금은 내가 한국어 자막을 추가해서 있지만, 그 당시에는 없었다.)

근데 설명을 전부 읽어보니 직접 하면 아예 추가를 할 수 있었다.

꽤 괜찮은 노래이고 여러 언어의 자막이 있지만 한국어 자막만 없다는 사실이 불편했던 난, 직접 번역하기로 했다.

번역을 시도하려고 해보다.

일단 파일을 다운 받고 열었다.
파일 형식은 .srt로 처음보는 형식이였지만 알고보니 암호화되지 않은 평문으로, 그냥 notepad++로 열 수 있었다.

알고보니 영상 자막 시간이 적혀있는 형식이였다.
나는 이 문장들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설명 들어가기 전에 잠깐 자체 QnA

그냥 기계번역 돌리면 안되냐 -> 그럴거면 자동 번역 쓰지, 왜 의역하겠어.

문제가 생겼다. 생각보다 어렵다.

나는 인문계도 아니고 직업계고 고등학생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도 수준이 굉장히 낮다.(영어쌤 미안해요 사실 안미안해요 수업 수준이 중학교때 배운거랑 별차이없어요.) 그래서 영어 번역이 어려울줄 알았다.

사실 나는 나름 영어를 잘한다.

초등학생때 외국에서 2년 동안 유학을 갔다오기도 하고 평소에 영어 유튜브를 즐겨 보기도 하고, 집에서 영어 모의고사를 풀었을 때 2~3등급을 왔다갔다 한다(공부 해본적 없음)
그렇다, 영어가 어려울줄 알았다는건 페이크다.

근데 문학 작품의 번역은 순수 영어실력과 결이 좀 달랐다.

일단, 이번에 번역할 문학작품 - 그러니까 이 뮤직비디오 - 노래는 평소에 비문학 지문을 이해하거나 외국 대학의 외국인 학생 학비 문제를 설명하는 영상 같이 사실 기반의 정보 전달 목적의 내용이 아니였다.
작가/제작자가 만들어놓은 세계관이나 이야기, 설정을 바탕으로 그 내용의 일부분을 함축하여 시청자들에게 표현하는, 문학 작품이다.
즉, 이 배경 내용을 얼마나 이해하느냐에 따라 번역의 단어 선택이 다르다.
또, 노래이기 때문에 음절에 맞춰 번역을 해야 했다.

이걸 어떻게 해야되는거지?

일단 게임번역에서 문제시 되는 영역인, 명사 일관성부터 지키기로 했다.
명사 일관성이란? 방금 지어낸 표현으로, 같은 뜻의 명사가 다르게 번역되는 현상을 말한다.
그리고 노래를 대충 들을때와는 다르게, 실제로 yonkagor가 가사에서 의도한 내용을 한국어로 번역해야 했다. 일단 노래부터 다시 들어봤다.

노래 해설이 필요해....

나는 이 노래를 발견한지 1주일정도 밖에 안된 상태에서 번역을 시도했기에, 작가가 만든 캐릭터 세계관 같은 내용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다행이 댓글에 이 영상은 어떤 병명을 묘사했다 라는 설명을 하거나 장문의 추측글을 올려준 덕분에 좀 더 이해하기 쉬웠다.

그래서 무슨 내용이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해당 노래는 해리 장애를 겪는 화자가 자신의 과거를 기억해낸뒤 다시 잊어버리는 과정을 묘사하는 노래이다.

이 정도면 번역시작해도 문제 없겠네

그렇다. 나는 번역을 시도했다.

번역

내용 사진

첫문장

첫 문장부터 고난이였다.
Did it really happen + Or were they pieces thrown around
이 문장은 두 문장인것 같으면서 한 문장이다.
나는 이걸 한 문장으로 번역한 다음에 다시 두 문장으로 나눠야 했다.
일단 기계번역을 돌려보자.

굉장히 어색한 표현들이 많다. 그리고 실제 가사의 의미를 담지 못한다.
예를 들어 where they pieces thrown around에서 pieces는 사실 '기억 조각'을 의미하며 thrown around는 이 기억들이 연결되지 않는 해리성 장애의 증상을 묘사한 것이다.
앞에 Did it really happen까지 이어서 번역을 하면 자신의 기억이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한다는 의미로 확장할 수 있다.
이걸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나는 나름대로 애써서 번역해봤다. 물론 불만족스러웠다.
최선은 아니고 차선인 느낌...
'널부러진 조각'이라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의역보다는 직역에 맞게 작성하였다.

두번째 문장

당연히 번역이 어색한 것과 별개로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이건 내가 실제로 번역한 내용인데, 한국어와 영어의 어순차이로 인해 문장이 달라졌다.
The past is built on lies -> 과거는 거짓으로 세워져 있어
Where one word could break it down -> 단 한마디로 무너질 수 있게
직역을 하자면 대충 이렇게 번역이 되는데, 확실히 한국어 다운 문장은 아니다.
그래서 원문과 달라지더라도 좀 더 어색하지 않은 문장구조를 위해 저렇게 번역했다.

어려웠던 문장 1

이건 단어가 살리기 어려웠다. 전의 문장에서 pieces를 조각이라고 번역했던건 말 그대로 어떤 내용인지 모르는 의미없는 기억 조각이라는 맥락에서 나온거라면 fragments는 기억을 정리하는 도중 관련되어 속하는 기억이지만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의미 있지만 내용을 모르는 조각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둘다 조각읕 같은데 맥락이 다름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능력 부족으로 그냥 파편이라고 번역했다.

전에 앞의 문장에서 기억대신 기억 파편이라고 좀 더 연상할 수 있게 번역했으면 좋았을 텐데 못했다.

여러모로 어려웠다.

어려웠던 문장 2

이건 진짜 맥락을 알기 어려웠다.
'Cause 는 Because를 줄여쓴 표현으로, Because 전에 어떤 문장에 대한 근거를 대는 문장인데, 그 어떤 문장이 어떤건지 모르겠다 ㅠㅠ
또 sweetness on your face에서 sweetness를 친절함이라고 번역했지만 엄밀히 따지만 친절함이랑은 약간 다르다.
bitter taste는 임의로 쓴맛이라고 번역했지만, 문학적으로 씁슬한, 쓰라린 이라고 표현하는게 맥락에 더 옳았다. 근데 노래 어순에 맞추면서 번역할 생각을 하니 머리속이 복잡해서 직역했다.
여러모로 아쉽다.

어려웠던 문장 3

이건 어떻게 번역을 해야할지 감을 못잡았다.
'몸이 소리지른다'라고 번역하는게 맞는 표현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더 나은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어려웠던 문장 4

이해 실패 + 어휘력 부족 콜라보
vision은 뭔가 바라보는 맥락에서 사용하는 시야라는 단어인데, 이걸 환상이라고 직역했다. 아무리 봐도 이 맥락에서 사용할 단어가 아닌거 같은데.
blend of anomalies 도 비슷하다.
이건 대충 해석할 수 없는 기억조각을 합쳤다는 의미 같은데 뭔가 표현할만한 적절한 단어를 몰라 이상현상의 혼합물이라는, 평소에 안쓰는 단어가 나오게 되었다.

어려웠던 문장 5

이 문단 전체가 정말 빡셌다.
Thrown away는 they를 수식하는데 they는

여기 첫문장의 던져진 기억조각과 동일하다. 이걸 맥락적으로 살리고 싶었는데 '버려진'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과거 문장과 동일성도 사라지고 맥락도 못살렸다.
잘못된 번역이였다.
locked behind my display도 vision과 연관된 단어로 시야와 관련된 단어로 번역하는게 좀 더 의도에 맞았겠지만 내 어휘력이 부족해 기억 깊은 곳이라는 다른 단어로 의역하게 되었다.
display - disarray 이 두 단어는 발음이 매우 비슷한 단어로, 문장의 끝이 소리가 비슷하게 의도한것으로 보이지만 번역에서는 이것도 못살렸다.
remember to forget them all은 잊어버리도록 기억하라는 모순적인 표현이지만 그냥 전부 잊어 버리게라는 전 문장과 연결성을 살리면거 본 뜻을 잃어버렸다.

어려웠던 문장 6

이건 확실히 어색할 수 밖에 없지만, 일부로 어순을 저렇게 빼놨다.
솔직히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문장 구조때문에 한눈에 안들어온다.
그치만 노래의 하이라이트에 가사가 어순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저렇게 해놨다.

기타

이외에도 처음보는 단어, 이해하지 못한 문장등으로 인해 실패한 경우도 있었다.
관심있으면 한번 해당 영상을 키고 직접 자막을 살펴보는건 추천한다.

후기

아마 새벽 1시~3시 정도 작업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생각보다 재밌었다.
기존에는 게임 번역에만 관심있었는데, 이번에 노래 자막을 번역해보면서 평소에는 배우지 않는 문학작품의 분석법, 영문법등 다양한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번역한 내용이 실제로 추가된게 매우 좋았다. (번역의 질이 부족한건 둘째치고)
이번 경험으로 만약에 대학에 간다면 영어영문학과에 진학하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컴공이나 정보보안이 우선이지만)